2006년 10월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A씨 지시로 국내 정치 상황 및 북한 관련 예민한 정보가 담긴 문건들을 작성해 미국 정부에 전달했다”는 충격적 증언이 나왔다. 조배숙 문광위원장이 “제기된 내용이 사실이라면 국가반역죄에 해당하는 중대 범죄”라며 수사를 의뢰해 재판으로 이어졌고, 2009년 11월 항소심에서 A씨는 위증 등 혐의로만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음으로써 사건이 종결됐다.
이 사건의 핵심은 국익에 위해를 가하고 명예를 실추시킬 수 있는 행위를 일벌백계함으로써 유사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1953년 제정된 형법에 규정된 간첩죄에는 ‘적국을 위해 간첩행위를 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를 처벌토록 규정하고 있으며, 여타 군 형법이나 국가보안법에도 ‘외국’을 적국이나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지 않는 한 사법조치할 수 없음에 따라 사건의 본말이 전도된 대표적 사례다.
▲채성준 서경대 군사학과장
14년이나 지난 이 사건을 새삼 들춰낸 이유는 오늘날 미·중 간 갈등으로 촉발된 신냉전 시대 도래와 함께 중동과 유럽에서 서방 대 반(反)서방의 대립 구도로 국제정세의 변곡점을 맞고 있는 가운데, 특히 동북아에서 형성되고 있는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결이라는 복합적 안보 환경과 관련이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나라의 현행 보안 관련법은 대부분 냉전 시대에 만들어져 북한 및 북한과 연계된 반국가단체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렇다 보니 정작 지난해 2월 발생한 중국 비밀경찰서 사건에서 우리 당국은 외국의 스파이 활동을 처벌할 법령이 없어 조사를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반해 중국은 국가이익을 내세우며 7월부터 ‘반간첩법’을 시행하고 있으며, 북한도 지난해 2월 개최된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에서 ‘국가기밀보호법’을 채택하는 등 발빠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타 서방 국가들의 경우에도 미국은 ‘방첩법’과 ‘외국요원등록법’, 일본은 ‘특정비밀보호법’, 독일은 ‘형법’ 등에서 외국을 위한 간첩 행위를 처벌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행 형법을 개정하지 않고는 우리 국가기밀이 북한이 아닌 중국 등 외국으로 누출되는 것은 사법 처리하지 못하고 반대로 그 나라 국가기밀이 우리나라로 누설되는 것만 처벌받는 불공정한 상황이 계속되리라 본다.
현행법에도 군사기밀보호법이나 산업기술보호법 등이 있지만 적용 대상이 제한적이라는 한계점이 있다. 오늘날 중국이 온·오프라인을 불문하고 글로벌 차원의 이른바 ‘영향력 공작’을 펼치면서 단순히 군사기밀이나 산업기밀을 넘어서 전방위적인 스파이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데 대해 미국이나 유럽 등 서방세계에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가까이 있는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간첩법이 국회에 발의되어 있지만 여야 간 정쟁에 파묻혀 이번 회기를 넘길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법무부 장관 재임 시에 간첩죄의 범위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형법 개정 의지를 보였던 만큼 조속한 입법이 이뤄질 것을 기대한다. 국가정보원이 지난 3일 ‘방첩업무 영역 확대’ 및 ‘외국 스파이 신고 포상 제도’ 등을 내용으로 하는 방첩업무규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는데, 최근 업무 영역이 축소된 국정원으로서는 국가기밀 보호 활동이 또 다른 블루오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정보·수사 기관도 마찬가지다.
<원문출처>
세계일보 https://www.segye.com/newsView/20240104513577?OutUrl=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