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다나스’가 오기 전까지 중부는 마른장마였다. 며칠 빗줄기가 비치더니 곧바로 폭염이 닥쳤다.
푸른 매실이 누렇게 익어가는 황매(黃梅)의 계절에는 큰비가 자주 온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장마를 梅雨 혹은 黃梅雨라고 부른다. 옛 중국 농부들은 장마 때 강수량을 어떻게 예측할 수 있었을까? 나름의 노하우가 있었다. 그들이 즐겨 불렀던 노동요(勞動謠)를 하나 보자. “도화(桃花) 물 넘치면 필시 마른장마(發盡桃花水 必是旱黃梅)로다.” 복숭아 꽃 피는 봄에 비 많으면 장마철에는 비가 적다는 얘기다. “봄날에 물 많으면 여름에 물 마르네(春水鋪 夏水枯)”라고도 노래했다.
이 같은 격언은 한둘이 아니다. “음력 정월 눈 내린다. 황매 때엔 물 들겠네(臘月里雪多 水黃梅).” 겨울에 강설량 많으면 장마 때 물난리가 난다는 얘기다. “동풍 불면 여름비 넘치니(行得春風 必有夏雨)”란 가사도 있다. 계절 간 날씨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이들은 진작에 간파했다. 옛 중국 농부들이 장마에 대비할 수 있었던 이유다.
관찰과 추적이 필요한 게 어디 날씨뿐일까. 특히 국가 간 갈등 국면에선 관찰이 핵심이다. 『세종실록』을 보자. 세종은 붕어(崩御) 사흘 전인 1450년(세종 32년) 2월 14일 동부승지 정이한에게 유언을 남겼다. “왜(倭)와 야인(野人·북방 여진족)은 가볍게 대할 일이 아니다. 언제라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조선 정부는 통신사 파견을 그만뒀고, 임란(壬亂) 직전 보낸 통신사들은 말이 엇갈려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징비록(懲毖錄)』을 보면 통신사 김성일은 침략 징후가 없다고 말한 이유를 “백성들이 동요할 것 같아서”라고 답했다. 기가 막힌 일이다. 왜란 직전, 부산의 왜인들이 물에 씻긴 듯 사라졌을 때도 조정은 태평무사였다. 왜란은 인재(人災)였다.
요즘 일본과 불편하다. 시비(是非)는 일단 접어놓자. 외교 관계에서 잘잘못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니까. 언제나 실익이 먼저다. 대의를 따질 때도 실익은 챙겨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손을 놓고 있었다. 추적은커녕 관찰도 없었다. 대기업 총수를 줄줄이 청와대로 불러 총알받이 삼는 듯한 뒷북만 칠 뿐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뒷북 아닌 ‘앞북’을 보고 싶다.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평범한 진리를 아직도 되뇌어야 하는가?
진세근 서경대 겸임교수·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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