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여명기부터 인류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 활발하게 교류해 왔다. 동서양은 ‘실크로드’라는 초원길, 사막길, 그리고 바닷길을 통해 다양하게 교류했는데 이 중 바닷길은 규모와 경제적인 면에서 육로보다 효율적이었다. 이에 7세기 이후 점차 육로를 대신하는 해상무역의 시대가 열렸다. 특히 삼면이 바다인 한국과 사면이 바다인 일본에는 육로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바다의 길이었다.
최근 서울에서 출발해 광주, 부산, 경북 경주, 제주의 국립박물관들을 다니며 전시회를 보고, 바다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게 됐다. 도자기나 불상, 동전, 자단목(紫檀木), 그리고 유리 제품 등 많은 문물이 바다를 통해 교류된 흔적들을 만나게 됐다. 그중 특히 부산 영도 국립해양박물관이 지난해 12월 시작한 기획전시 ‘불교의 바닷길’은 신선한 감동을 일깨웠다. 이 전시는 해양과 관련된 불교 유산을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3부에서 소개된 조선과 일본에서 비롯된 전시물과 에피소드 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중국과 조선·일본 사이의 해상에서 사고가 빈번했다고 한다. 17세기 조선 숙종 때, 중국에서 일본으로 향하던 무역선이 전남 임자도에 표류하면서 ‘가흥대장경(嘉興大藏經)’이 해안에 떠밀려와 유입되었고, 이를 목판으로 재판각하면서 조선 후기 불교계와 인쇄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바닷길의 표류 사고가 문화 교류로 이어진 또 다른 사례로 19세기 전남 해남 대흥사 천불상(千佛像) 이야기가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 등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조선과 일본의 표류 송환 네트워크 체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경주 지역 옥석으로 만들어진 천불이 완성되자 몇 척의 배에 나눠 싣고 울산을 거쳐 바닷길을 통해 대흥사로 향했는데, 도중에 한 배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일본 나가사키(長崎)현에 닿았다고 한다. 노스님이 눈물로 불상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나가사키현에선 이를 조선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전시장에는 그렇게 바다를 건너 돌아온 불상 셋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편안히 앉아 계셨다. 표면에 칠해진 흰색 호분(胡粉)과 노란색 의상이 너무 잘 어울려 보였고, 이를 보며 대흥사로 무사히 돌아온 것이 참 다행이라 생각됐다.
또한 해상과 관련이 깊은 관음보살 불화로 현등사 ‘수월관음도’, 연화사 ‘천수관음도’, 도갑사 ‘삼십이관음응신도’(모사본) 등 쉽게 볼 수 없는 귀한 문화재들이 전시돼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바다를 통한 문화 교류를 불교문화에 초점을 맞춰 보여주는 것 같지만, 종교라는 테두리를 넘어 문물과 사상의 교류라는 보다 큰 스케일의 이야기로 꾸며졌기 때문에 관객들이 다가가기 쉬우면서도 깊이 있는 전시였다. 그래서인지 이 전시를 본 감동은 관람한 지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식지 않는다.
문득 내가 1980년대 초반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 한국 문화에 빠져버린 계기가 생각났다. 당시 나는 1310년에 그려졌다고 전해지는 높이 4m 넘는 고려시대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를 일본 사가(佐賀)현 현립박물관에서 직접 보았다. 그 순간 화려함과 섬세함, 그리고 무엇보다 고귀한 형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신비한 미소의 연유를 알고 싶었다. 결국 그 보살상 그림에 이끌려 한국에 머무르게 됐다. 그리고 4년가량, 정신없이 고려불화를 보며 미친 듯이 도상을 재현해 보려 했다. 그리고 바닥에는 파도치는 물결을 그렸다. 그 보살의 발밑 바닥에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닌 바다였다.
전시를 보며 20대의 내가 겁도 없이 바다를 건너왔던 까닭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다른 문화를 접하며 느꼈던 두려움과 충격, 감동 때문이었다. 바다를 건너가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바닷속에 사라져 간 수많은 옛 승려와 상인들의 열정을 전시를 보며 느낄 수 있었다. 이 전시는 하나의 종교 이야기를 넘어선 인류의 이야기다. 인류가 열정과 지혜를 가지고 문화적 기적을 이루는 역사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원문출처>
동아일보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10219/1054909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