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세 아이가 있다. 정직한 아이와 착한 아이, 그리고 예쁜 아이, 이 세 아이들 중 누가 더 많은 사랑을 받을까? 예쁜 아이, 착한 아이, 정직한 아이 순에 대다수가 동의할 것이다. 풋풋한 젊은이 셋을 두고 순위를 매긴다면 어떨까? 근소한 차이로나마 착한 청년, 잘 생긴 청년, 정직한 청년 순서가 아닐까?
그럼, 중년 이상의 성인들을 줄 세운다면? 아마도 정직한 사람, 착한 사람, 그 다음에 아름다운 사람이 오지 싶다. 어른들의 각종 경선에서 일등 이등 삼등 대신에 진(眞), 선(善), 미(美)로 갈음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진이 성격이나 언행에서는 정직으로 나타나고, 선은 착한 태도로 나타나는 것을 이해하자.
먼저 아이들의 경우 그들의 말이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아주 미미하므로 그저 보기에 좋은, 예쁘면 족하다. 다음으로 말 잘 듣고 온순한 아이가 귀여움을 받을 것이고, 거짓말을 조금 하는 것은 오히려 재미있는 애교점이니, 정직성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젊은이들의 경우는 좀 복잡하다. 그들에게 어떤 덕성이 더 이목을 끄는 요소가 될지는 보는 사람들의 입장이나 기대치에 따라 선호가 많이 달라질 것 같기 때문이다. 사랑의 쓴 경험이 없는, 또래의 청춘에게는 아름다움이 우선일 것 같고, 세상 물정을 조금은 아는 사람이라면 착한 면을 높이 사지 않을까. 사회나 가정에서 착한 것만큼 두루 칭송되는 것은 없다. 선함은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과 가까우며 배려심과 이웃하고 있고 겸손하기까지 하니까. 이러니 착한 청년이 잘 생긴 청년보다 조금 앞설 것 같지 않은가. 정직함도 중요한 인성이기는 하나 그가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지 않는 한 선에게 살짝 밀리지 싶다. 바람을 피우고 ‘거짓말 하는 배우자(不正直)’보다 ‘바람을 피운 그 자체(非行)’가 더 싫은 것이 젊은 인정이 아닌가.
성인들, 크거나 작으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며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성인의 경우는 깊은 고민 없이 진(眞)이 으뜸이다. 진리, 참됨, 법, 도(道)에서부터 정직, 정의, 공정함까지가 모두 진의 영역이다. 자연의 원리가 진리이고 사회를 지탱하는 받침대가 공정이다. 자연과학은 물론 기독교, 불교, 유교를 비롯한 각종 종교와 철학, 윤리, 법률 등 모든 인문 사회과학 분야에서 진리 또는 정의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소이(所以)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세상이 그렇게 되게끔 되어 있는 것, 그것이 법이다” “오늘 도를 깨치면 내일 죽어도 좋다” “기회는 균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롭게!”
지금까지 인류가 받아 든 그 많은 교훈 중에서도 가장 앞자리를 차지한 것은 모두 진 또는 정의에 관한 언급이었음이 그것의 가치를 입증한다. 문제는 진리와 정의가 종종 피를 부른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는 이들에게는 최고의 진리인 성경과 코란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던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피의 보복과 전쟁들은 하나같이 정의의 깃발 아래 자행된다. 진이 세상을 존재하게 하고 구색을 갖추게 하는 틀이라지만 믿을 게 못된다.
우리 사회도 으뜸 덕인 진실과 정의를 두고 몸살을 앓고 있다. 진실이 교언과 뻔뻔함에 묻혀지고 공정이 사술에 휘둘리고 있다. 어쩌면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참으로 염치가 없다. 사람은 거창한 진실이나 정의보다 우선 착하게 사는 일이 먼저라는 사실을, 남의 기회를 가로채거나 특별 대우를 바라지 않는 것이 기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착한 사람은 양심이라는 깨끗한 거울이 늘 앞에 버티고 있어 속 검은 짓을 할 수가 없다.
그런 중에 미, 곧 아름다움이 말석인 것은 유감이다. 이맘때면 생각나는, 달빛 아래 메밀꽃에 대한 이효석의 숨 막히는 문장, 외로운 가슴을 적시는 쇼팽의 ‘즉흥 환상곡’ 그리고 꿈결인 양 일렁이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 같은 위대한 예술이 선사하는 감동과 위로를 생각해 보라.
진실과 공정을 논하는 곳에는 싸움이 있으나 아름다움이 있는 곳엔 화합이 있다. 진과 선이 지배하는, 건조하고 재미없는 세상에 보기좋고 듣기 좋고 느끼기 좋은 것들로 촉촉히 스며들어서 사는 행복을 알게 해주는 참 좋은 친구인데, 억울하게도 조연 대접밖에 못받고 있다.
그렇더라도 아름다움이 진실을 두고 벌이는 싸움을 말리지 못하니 선함이 나설 수 밖에 없다.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선의 최소한이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것이 선의 중간이며, 타인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것이 최선이다. 예수는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림으로써 최고의 선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길이 되고 진리가 되었다. 싸움 많은 이 세상은 정의롭게 사는 것보다 착하게 사는 것이 우선이다. 착하게 살 일이다.
<원문출처>
e대한경제: https://www.dnews.co.kr/uhtml/view.jsp?idxno=2020100709585894206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