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대학교

Today
서경광장 > 서경 TODAY
서경대학교의
새로운 소식과 이벤트들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권재욱 서경대 특임교수.jpg


실한 건더기 하나 건진 것 없이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허전함인지 조바심인지 새벽같이 잠을 깬다. 창 밖 바람소리가 사납지 않다는 느낌에 점퍼 옷깃을 세우고 집을 나선다. 길섶과 언덕배기 마른 관목 가지 위에 하이얀 꽃이 피었다. 겨울의 순결한 정령, 서리가 앉은 것이다.

 

새삼스레 세상이 얼마나 깨끗하며 아름다운 곳인지를 깨닫는다. 들길로 들어서니, 논바닥 벼 그루터기와 이 고랑 저 고랑에 편하게 누운 이삭들, 논두렁 마른 풀잎 위에서 눈 부시게 빛나는 서리꽃이 계시처럼 눈을 찌른다. 평범한 삶의 흔적과 노작들 위에 내려 앉은 하늘의 점지. 인간이 얼마나 순결한 기운 속에서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맑은 지혜와 차가운 숨결, 한 치도 양보할 것 같지 않은 정직함의 고집이 고스란히 응결되어, 오지게 붙어있는 붉은 단풍 잎에 덧입혀 피어난 서리꽃이다. 봄날의 꽃보다 더 아름답다는 서리 앉은 그 단풍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상가집에 다녀 오시던 엄마의 순백한 옥양목 치마에서 풍겨오던 알싸한 내음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걸음마다 스며온다. 누군가를 영원히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마음의 빈자리가 하이얀 치마폭에 고스란히 맴돌았다. 사람을 보내는 마음이 세월을 보내는 마음을 닮았다. 삶의 무게, 살아남은 자의 고독이 세모의 들길 위에서 호젓이 맞이한다.

 

한 해가 저무는 이즘에는 서리 앉은 새벽길을 걸어 볼 일이다. 칼날 같이 예리해진 이성이 두루뭉술 지내온 나날들의 곁가지를 사정없이 잘라나고 오로지 순정한 결기로 응고된 자신을 본다. 한 해 동안 쌓였던 게으름과 미움과 헛된 기대가 서릿발에 멈칫 물러나며 흐릿해진 정신에 깃대가 꽂힌다.

 

젖은 짚단 태우듯 보낸 한 해라 자책하는 것도 사치스럽다. 코로나에 지치고 증오로 칠갑된 사회에 주눅들어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했다고 한 숨 쉴 일도 아니다. 아랑곳할 곳 없는 마음은 전봇대에 걸린 연처럼 분주히 펄럭거리기만 할 뿐 허공을 맴돌았지만, 연이 전봇대에 걸린 것이 운이 나빠 그리되었듯, 어느 바람이 순조로운 날 걸린 고리에서 벗어나 힘차게 비상할 날이 있음을 믿는다. 희망은 우연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다.

 

그리고 우연은 아름답다. 로트레아몽의 싯귀처럼 수술대 위에서 우산과 재봉틀의 우연한 만남처럼 아름다운것은 흔히 기막혀서 아름답다. 드물게 아주 드물게 찾아오기에 아름답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애써 음원을 찾아 듣는 것보다 우연히 라디오나 스피커에서 듣게 되었을 때 훨씬 더 반갑고 감동이 컸던 기억이 있다. 미리 약속하여 만날 때보다 시장통의 골목에서 우연히 만난 연인이 더 반갑지 아니하든가.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진 것 같아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난다는 거니까요.“ 어린 소녀 빨강머리 앤의 말은 아름다운 위로의 복음이다. 세상이 내 생각대로 다 된다면 얼마나 재미없고 지루하겠는가. 우리가 살아 갈 이유는 세상이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았기에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고, 내일이나 그 언제든 생각지도 못한 굉장한 일이 일어 날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 아닌가.

 

인생은 초콜릿 박스와 같다. 어떤 것을 잡을지 모른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나왔던 명대사다. 여러 가지 초콜릿이 담겨있는 상자에 손을 넣으면 어떤 것이 잡힐지 알 수 없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늘 쓴 초콜릿만 얻어 걸리란 법은 없다. 때로는 살살 녹는 달콤한 것을 입에 넣고 환희에 들떠는 날도 있을 것이다. 바라기는 새해에는 아예 유리로 만든 투명한 초콜릿 박스를 받았으면 좋겠다. 초콜릿 색깔의 농담(濃淡)과 모양과 포장지를 요모조모 살펴보고 가장 그럴 듯한 것을 고르면 살패할 확률이 훨씬 줄어들 테니까 말이다. 그런다고 안심할 수야 없다. 초콜릿은 결국 입에 넣고 씹어 봐야 진가를 알 수 있으니까.

 

이윽고 첫 햇살이 들판에 보석처럼 쏟아진다. 순식간에 서리꽃은 지고 들판과 논두렁과 언덕엔 갈색 덤불과 누렇게 빛바랜 잔디가 민낯으로 얼굴을 내민다. 그들 빛이 지금 비록 잠시 초라하나 한때는 왕성했고 찬란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할 것이라. 당장 내일 아침이면 하이얀 서리꽃이 다시 눈 부실 것이며, 눈이라도 내리면 은빛 별천지로 변신할 것이고, 얼마 안 있어 예쁜 봄꽃과 신록이 환희의 송가를 부를 것이다.

 

그러니 기다려 보자. 곧 도착할 투명한 초콜릿 박스를. 그리고 새해에는 아침마다 빨강머리 앤의 마음으로, 희망의 주문으로 눈을 뜨자. ”아침은 어떤 아침이든 즐겁죠.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고 기대하는 상상의 여지가 충분히 있거든요우연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이 희망이다. 빛나는 희망의 아침이다.


<원문출처>

대한경제 https://m.dnews.co.kr/m_home/view.jsp?idxno=202112261619227590749

List of Articles
Lis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이즈미 지하루 서경대 글로벌비즈니스어학부 교수 칼럼: 요절한 남편 평생 사랑, 이중섭의 아내[이즈미 지하루 한국 블로그] file 홍보실 2022-10-07 46540

서경대학교 피아노 앙상블 SPE, 11월 30일 제5회 정기연주회 개최 file

오는 11월 30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서경대학교 피아노 앙상블 SPE 제5회 정기연주회가 열린다. 피아노 앙상블 SPE는 서경대학교 음악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피아니스트이자 교수 및 강사들이 음악의 뜻을 함...

서울교육청 이상봉 디자이너와 함께하는 '다문화 꿈토링스쿨' 운영 file

서울시교육청은 패션에 관심 있는 다문화 학생들이 자신의 관심 분야를 탐색해볼 수 있는 '2021 다문화 꿈토링스쿨'을 운영한다고 6일 밝혔다. '꿈토링'은 꿈과 멘토링을 합친 말이며 올해 꿈토링스쿨은 패션디자인과 패션모...

서경대학교 청년문화콘텐츠기획단, 2021년 성북구 유튜브 활성화 위한 영상제작 참여 file

서경대학교 청년문화콘텐츠기획단(이하 ‘청문단’, 운영위원장 방미영 광고홍보콘텐츠학과 교수)이 2021년 성북구 유튜브 활성화를 위한 영상 제작 프로젝트를 2월부터 12월까지 진행한다. 서경대 청문단은 2013년 창단된 홍보실 ...

서경대학교 공연예술학부 뮤지컬전공 제18회 정기공연 ‘The Wedding Singer’ 개최 file

5월 19일(목)부터 22일(일)까지 사흘 간 교내 문예홀서 총 다섯 차례 공연 3년 만에 열리는 외부관객 오픈 무대 서경대학교 공연예술학부 뮤지컬전공의 제18회 정기공연 ‘The Wedding Singer’가 오는 5월 19일(목)부터 2...

서경대학교 문화예술센터, 「지역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노력」 기획시리즈 #2 <지역사회협력팀> file

서경대학교 문화예술센터(전 예술교육센터. 센터장 공연예술학부 한정섭 교수)는 재학생들의 성공적인 사회 진출을 돕기 위해 산학협력 차원의 다양한 문화예술 관련 공연 및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지역 문화예술 발전에...

[2023 수시특집/서경대학교] ‘미래형 교육방법’ 도입으로 창의융합 실용인재 양성 file

서경대의 3대 가치, 한류·산학역량·지역사회 공헌으로 집약 국내 최초 교육플랫폼…실습·토론·문제해결중심 학습체제 구축 융합대학 내 아트앤테크놀로지학과, 스포츠앤테크놀로지학과 신설 <서경대 대일관 전경> 1947년 개교한 서...

제1회 서경대학교 총장배 인터내셔널 골프챔피언십 성료 file

8~17일 강원도 웰리힐리CC에서 열려…아마추어 골퍼들 수준급 기량 뽐내 중ㆍ고등부 수상 선수들이 트로피를 치켜들며 환호하고 있다. 서경대학교는 올해 수시전형을 통해 새롭게 개설되는 스포츠엔테크놀로지학과를 기념해 서...

[카드로 읽는] 서경대학교 2021 정시모집 file

<관련기사> 대학저널 http://www.dh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4286

[진세근 서경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칼럼]인민해방군 첨단 기술주, 중 증시 들었다 놓을 슈퍼베이비 file

인민해방군(PLA) 보물창고가 열렸다 중국에서 가장 알짜 기업은 어디일까? 기준에 따라, 보는 각도에 따라 답은 여럿일 수 있겠다. 그러나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최대, 최우량 기업이 있다. 바로 인민해방군이다. 인민해방군은...

[이즈미 지하루 서경대 국제비즈니스어학부 교수의 한국 블로그]지방의 ‘향기’가 매력이다 file

요즘 주말이면 자주 지방을 여행한다. 대전, 제천, 예천, 안동, 부산 등이다. 지방에는 서울에 없는 매력이 넘친다. 황금빛 풍광, 불어오는 바람, 향긋한 내음에 매료된다. 당연하지만 지방마다 각각 개성이 담긴 훌륭한 문화...

Today
서경광장 > 서경 TODAY
서경대학교의
새로운 소식과 이벤트들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