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대학교

Today
서경광장 > 서경 TODAY
서경대학교의
새로운 소식과 이벤트들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권재욱 교수.jpg


초저녁 바람이 차다.

 

황혼을 피해 갓 나온 별들이 이럴줄 몰랐다는 듯 추위에 슬몃 흔들린다. 골짜기 잔설을 비비며 내려 온 바람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에서 가늘게 떤다. 낼 모레면 설날인데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한 한기에 가슴이 시리다.

 

설날을 앞둔 요 며칠이 항상 어려웠다. 그 시절에는. 운 좋으면 설빔 하나 건질지 모른다는 기대감과 먹거리와 놀거리가 쏠쏠한 설날을 기다리는 아이들은 벌써부터 들뜬 분위기지만, 어른들의 얼굴엔 그림자가 짙어 갔다. 설날 차례상을 위해 아껴둔 떡가래 뽑을 쌀 몇 되박과 고사리, 호박고지, 아주까리 등 나물거리에 더 이상 손 댈 수 없는 어머니는 만만한 방구석 콩나물 옹기항아리에 물을 퍼 부으며 심사를 달래곤 했다. 그때마다 겨우내 닳고 닳은 문풍지가 파르르 떨었다.

 

생각하면 아득히 먼 옛날 같지만 불과 한 세대 남짓 전 풍경이다. 생각하면 어떻게 그 딱딱하고 굴곡진 모개나무 옹이 같은 세월을 견디며 살아내었을까? 생각하면 서럽고, 다시 생각하면 감사한 시절이었다.

 

이맘때면 어머니는 나에게 안산 아래 종훈이 엄마에게 심부름을 보냈다. 방앗간에 같이 좀 가주면 어떻겠냐고. 당신이 허리가 성치 않아서라는 말을 빼먹지 말고 꼭 전하라며. 이튿날 두 어머니는 뽀얗게 물에 불린 쌀을 소쿠리에 나눠 이고는 방앗간으로 향했다. 저물녘 종훈이네 사립문 안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소쿠리가 경쾌하게 흔들거리며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서양인들은 우리의 정()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한다. 모든 것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힐 듯 분명해야 끄덕이는 그들에겐 그럴 것이다. 정은 은근해야 맛이다. 서양인에겐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 정도가 정의 표현이라 할 만하나, 이는 내 마음의 기준일 뿐 상대편에 대한 배려가 없다. 상대가 민망해 하면 정이 아니다.

 

정은 서로 마주 본다고, 주고 받는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보낸 사연으로, 그 느낌으로 깊어진다. 즐거운 일이면 즐거운대로, 슬픈 일이면 또 그것대로 저녁 노을같은 그림으로 곱게 그려진다. 그림 속에는 늘 사람이 있다. 그를 웃음지게 한 너스레가 있고 그녀를 토라지게 한 사건이 있다. 소소한 일상이라도 순수한 마음의 교감이기에 장면마다 아름답고 소중하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황동규 시인이 그의 아버지 황순원님이 쓴 소나기를 시로 환생시켰다는 소리를 듣는, “즐거운 편지속의 그대, 거리는 멀어도 오랜 기억 속의 사소함으로불러 보는 그대는 언제나 애틋하다.

 

종훈이에겐 어질고 예쁜 누나가 있었다. 그 누나는 동생의 학비와 가사에 보탬이 되고자 초등학교를 졸업하기가 무섭게 봉재 공장에 취직을 했다. 종훈이의 공고 진학을 앞두고는 더 나은 벌이를 위해 직장을 옮겨야 했고, 결국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떠나갔다. 미국으로 가기 전 누나는 한 소꿉친구에게, ‘세상에는 죽는 셈치고 하는 결혼도 있고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하는 결혼도 있다.’라는 말을 흘렸다고 한다. 얼마 후 미국에서 종훈이의 장사 밑천이 부쳐져 왔다. 눈물 젖은 편지에는 엄마 아빠 잘 모시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종훈이의 사업은 그의 어리숙한 성정으로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고, 누나에 대한 죄스러움을 술로 달래다 거의 폐인이 되었다는 소문만이 들려 왔다. 그에 대한 소식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진작에 그를 찾아 야윈 어깨라도 한번 따뜻이 안아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미안하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아셨다면 나를 많이 나무라셨을 것이다.

 

설날이 다가오니 올해 따라 어린시절 설날 풍경과 어렵게 살아내던 이웃들의 선한 모습이 애련히 되살아 난다. 요즈음 부쩍 힘들어 하는 사람들의 한숨이 그 시절 증기기관차가 푹푹 내뿜던 더운 김을 닮아서인가? ‘거리두기로 호박떡 같은 인정을 이번 설날에는 오글오글 나눌 수 없기 때문인가?

 

달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구름과 함께 거닐 때이다. 바람이 존재를 알리는 것은 나뭇잎을 흔들 때이다. 사람은 사람과 공감할 때 사는 의미가 있다. 함께 느낀 것이 많을수록, 사심이 적을수록 그 사람이 더 소중하다. 조만간 추위도 가고 그 누님 같은 훈풍이 마지막 잔설마저 녹여 낼 것이다.

 

황 시인의 편지를 마저 읽는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아직, 바람이 차다.

 

(글 속의 이야기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가명을 썼고, 약간 각색하였음.)

 

<원문출처>

e대한경제 https://www.dnews.co.kr/uhtml/view.jsp?idxno=202102070912561460525

List of Articles
Lis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sort 조회 수
공지 이즈미 지하루 서경대 글로벌비즈니스어학부 교수 칼럼: 요절한 남편 평생 사랑, 이중섭의 아내[이즈미 지하루 한국 블로그] file 홍보실 2022-10-07 53072

[기고] 5G 시대, 소모적 LTE 대가 갈등보다 협력이 필요한 시점 file

임철수 서경대 컴퓨터공학과 교수 지난해 4월 정부와 통신업계의 협력을 통한 ‘세계 최초 5G 상용화’ 이후, 국내 5G 가입자는 8월 말 기준 865만명을 돌파, 연내 1천만명 돌파가 예상되는 등 바야흐로 본격적인 5G 시대가...

코로나19 상황..서경대학교, 적성고사 앞두고 유의사항 전달 file

서경대학교가 적성고사를 앞두고 코로나19 방역 등과 관련한 유의사항을 수험생들에게 전달했다. 7일 서경대학교 입학처는 코로나19 상황에 따른 2021학년도 수시 적성고사 유의사항을 공지했다. 코로나19 방역에 따라 모든 수험생...

권재욱 서경대 특임교수 칼럼:[시론] 정의로운 삶보다 착하게 살기 file

여기 세 아이가 있다. 정직한 아이와 착한 아이, 그리고 예쁜 아이, 이 세 아이들 중 누가 더 많은 사랑을 받을까? 예쁜 아이, 착한 아이, 정직한 아이 순에 대다수가 동의할 것이다. 풋풋한 젊은이 셋을 두고 순위를 ...

서경대 뮤지컬학과 학생들, 뮤지컬 영화 ‘K스쿨’ 대거 출연 file

서경대, 뮤지컬 영화 ‘K스쿨’ 제작사 강 컨텐츠와 산학협력 MOU 서경대학교(총장 최영철) 뮤지컬학과 학생들이 우주소녀 다원, 에이프릴 예나, 멋진 녀석들 백결과 의연이 출연하는 뮤지컬 영화 ‘K스쿨’에 조연과 단역, 앙...

[한글날] ‘시각 차별’하지 맙시다 file

노안·저시력자 위한 글꼴 개발한 이종근 디올 연구소 대표(서경대학교 경영문화대학원 보건복지경영전공 4학기 재학) 9월29일 서울 고려대학교 산학관 디올연구소 사무실에서 이종근 대표가 저시력자·고령자를 위한 글꼴인 ‘디올폰트’...

실외 천막에서 10m 거리두고 노래, 코로나 19가 만든 대입 실기 풍경 file

서경대 실용음악과 보컬전공 수시전형에 지원한 한 수험생이 16일 서울 성북구 서경대 풋살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서경대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실내가 아닌 야외에서 시험을 진행했으며, 심사위원과 수험생의 거리를...

[페이스 오브 아시아] 패션모델 이서영 “제게 스무살은 청춘이 아니에요” file

▲모델 이서영은 아시아 24개국 77명의 남녀 엘리트 패션모델들이 참여하는 '언택트 페이스 오브 아시아 인 서울'의 한국 대표이다. 이서영, 아직은 미완의 잠재력, 그러나 본능적으로 패션의 아이코닉을 찾아내 표현하는 영감의...

[단독] 박근형 아들 윤상훈 "실검 1위 신기해…父와 통화 아직"(인터뷰) file

배우 박근형 아들 윤상훈(본명 박상훈)이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 소감을 밝혔다. 윤상훈은 14일 매일경제 스타투데이와의 전화 통화에서 "어제 지인분이 연락을 주셔서 실시간 검색어에 이름을 올린 줄 알게 됐다. 그럴...

[이종일의 창업세상]<25·끝>마을공간이너프, 청년·주민 문화예술 지원 file

송경진 대표 2019년 인수, 사명 변경 문화예술 교육·마을공동체 사업 주력 내년 예술인 커뮤니티 운영 예정 "예술가의 안정적 삶, 창작 보장해야" 인천 청년예술가단체 ‘아침의트리오’ 소속 피아니스트 문은비씨와 플루티스트 ...

서경대학교 대학혁신추진사업단 주최 ‘2020학년도 비교과 프로그램 공모제’ 수상작 발표 file

컴퓨터공학과 신산 학우, ‘코로나 시대 유튜브를 해야 하는 이유!(feat. 영상편집)’로 대상의 영예 안아 최우수상 1명, 우수상 3명, 장려상 11명 등 총 16명 수상 독특하고 전문성 있는 기획안들로 학우들의 창의성 잘 드러나...

Today
서경광장 > 서경 TODAY
서경대학교의
새로운 소식과 이벤트들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