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보수의 보편적 주거복지정책… 오세훈 ‘장기전세’ 재평가받아야

복지는 진보의 전유물일까. 한국 정치에서는 오랫동안 복지는 진보, 성장은 보수라는 이분법이 통용됐다. 그러나 서울시가 2007년 시작한 장기전세주택 ‘시프트(SHift)’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이러한 구분이 얼마나 낡은 것인지 알 수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도입한 장기전세는 기존 공공임대와 출발부터 달랐다. 집을 사지 않아도 최장 20년간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도록 하고, 저소득층뿐 아니라 무주택 중산층까지 공공주택의 대상으로 끌어들였다.
당시 서울시는 시세보다 낮은 전세보증금으로 50㎡대에서 120㎡대까지 공급해 중산층의 실수요도 흡수하려 했다. 이는 ‘공공임대는 가난한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인식을 깨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왜 중산층까지’… 보수에서 시작된 보편적 주거복지
도입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왜 중산층에게까지 공공주택을 공급하느냐”는 비판이 나왔다. 임대주택과 분양주택의 중간 영역을 개척하다 보니 기존 제도와 충돌하는 문제도 적지 않았다. 실제 서울시는 관련 법규가 마련되기 전인 2007년 국민임대 승인 물량 등을 장기전세로 공급했다.
재정 문제도 논란이었다. SH가 받은 전세보증금은 언젠가 입주자에게 돌려줘야 하기 때문에 회계상 부채로 잡힌다. 공공이 주택을 팔지 않고 계속 보유하면 자산은 남지만 보증금 반환채무도 남는다.
관련해 당시 장기전세주택 ‘시프트’를 기획한 임성은 서경대 교수는 “전세보증금이 건설재원 조달에는 유용하지만 부채로 처리되는 회계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이러한 부채의 성격을 일반적인 재정 부실과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주택을 팔아 부채를 줄이면 장부는 좋아질 수 있다.
하지만 공공은 주택이라는 자산을 잃는다. 반대로 SH가 주택을 계속 소유하면서 시민에게 장기간 공급하면 공공자산은 축적되지만 보증금 반환채무 때문에 부채가 커 보인다. 부채 총액만으로 정책의 성패를 판단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장기전세의 더 큰 의미는 복지정치에 있다. 잔여적 복지는 시장에서 탈락한 저소득층을 지원한다. 반면 보편주의적 복지는 중산층까지 정책의 이해당사자로 끌어들인다.
중산층은 세금을 내는 사람인 동시에 복지의 수혜자가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복지는 특정 계층을 위한 시혜가 아니라 시민이 함께 지키려는 사회제도로 발전할 가능성이 커진다.
장기전세는 바로 그 가능성을 보수 정치가 보여준 사례였다. 엄밀한 의미의 보편적 복지는 아니지만, 저소득층 중심이던 공공임대의 외연을 무주택 중산층까지 넓힌 ‘보편주의적 주거복지’의 실험이었다. 당시에도 “왜 중산층에게 공공주택을 공급하느냐”는 비판이 있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이 정책의 혁신성을 보여준다.
◆서울에서 시작한 장기전세, 국가 제도가 되다
더 흥미로운 것은 중앙정부가 뒤따랐다는 사실이다. 서울시가 장기전세를 시작한 지 2년 뒤인 2009년 정부는 임대주택법을 개정했다.
법률에 아예 ‘장기전세주택’을 신설하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대한주택공사와 지방공사가 20년 범위에서 전세계약 방식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지방정부의 실험이 국가 제도로 올라간 것이다.
말하자면 중앙정부가 서울의 정책을 벤치마킹한 셈이다. 보수 서울시장이 시작한 중산층 주거정책이 국가의 공공임대 제도를 움직였다는 점은 정책사적으로 평가할 대목이다.
그러나 이후 서울시의 장기전세 공급 동력은 충분히 이어지지 못했다. 민주당과 박원순 전 시장 시기에는 SH 부채와 기존 사업에 대한 재검토가 강조됐고, 장기전세 역시 오세훈 시정 초기와 같은 정책적 우선순위를 유지하지 못했다.
오 시장이 10년 만에 서울시로 돌아와 장기전세 확대를 다시 꺼내든 배경도 여기에 있다.
물론 오늘의 전세난을 특정 시장이나 한 정책의 중단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금리와 주택공급, 매매가격, 전세사기, 인구·가구구조 등 수많은 요인이 얽혀 있다.
그러나 서울시가 민주당이 장악했던 지난 10여 년 동안 장기전세를 지속적으로 확대했다면 어땠을까. 수만 가구가 추가로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장기간 거주할 수 있었다면 전세시장의 충격을 흡수하는 공공의 완충지대는 지금보다 두꺼웠을 것이다.
주택정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임자의 흔적을 지우는 정치상품이 돼서는 안 된다. 좋은 정책이라면 진보가 만들었든 보수가 만들었든 이어가야 한다.
◆장기전세 20년, 보수의 정책 기획력을 다시 보다
장기전세 20년의 역사는 보수 정치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보수는 복지를 줄이는 정치여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시장경제를 존중하면서도 시장이 해결하지 못하는 영역에서는 공공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저소득층을 넘어 중산층까지 정책의 이해당사자로 만들 수 있다.
오세훈의 장기전세는 그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다. 소유가 아니라 거주 안정을 정책 목표로 삼고, 중산층을 공공주택으로 포섭했으며, 서울의 정책을 국가 제도로 확산시켰다.
보수 정치가 재평가받아야 할 지점도 여기에 있다. 이념의 구호보다 중요한 것은 정책을 기획하는 능력이고, 숫자를 넘어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며, 그것을 실제 제도로 만드는 실천력이다.
장기전세가 남긴 20년의 궤적은 복지가 어느 진영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좋은 복지는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 국민의 삶을 안정시키고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며 중산층까지 정책의 지지자로 만드는 것, 그것이 오히려 오래가는 복지다.
이제 오세훈의 장기전세도 그런 관점에서 다시 평가받을 때가 됐다.
<원문출처>
천지일보 https://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3431203(새 창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