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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성준 서경대 군사학과 교수 칼럼: [채성준 칼럼] 총성 없는 전쟁, 첨단기술 유출 앞에 선 한국

↑↑ 채성준 서경대학교 군사학과장, 안보전략연구소장,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

병오년 새해를 맞은 대한민국 앞에는 여러 위협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 성장 둔화와 인구 감소, 글로벌 공급망 재편, 불안정한 안보 환경은 이미 구조적 위험으로 자리 잡았다. 이 가운데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치명적으로 국가 근간을 허무는 것이 바로 첨단기술 유출이다. 총성과 경보는 없지만, 한 번 외부로 흘러간 기술은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 그 파괴력은 군사적 위협에 버금간다.

지난해 말 삼성전자 전·현직 임직원들이 중국 반도체 기업에 최첨단 DRAM 공정 기술을 넘긴 혐의로 기소됐다. 문제의 기술은 수조 원의 연구개발 투자와 수십 년에 걸친 축적이 집약된 국가 핵심 자산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기업 범죄를 넘어, 우리의 전략 산업이 해외 경쟁국의 전략적 이해와 산업 정책에 따라 구조적으로 위협받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경찰청 및 관계 부처 통계에 따르면 2019년 이후 5년간 첨단기술 해외 유출 사례는 100건에 육박하며, 이 중 3분의 1 이상이 국가 핵심 기술로 분류된다. 최근 1년간 적발된 해외 기술 유출 사건만도 20여 건을 넘어섰고, 이 중 약 4분의 3이 중국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2차전지와 배터리 소재 등 한국의 미래 성장 동력이 주요 표적이다.

더 심각한 대목은 유출 방식이다. 기술 유출 사건의 80% 이상은 외부 해킹이 아니라 내부 인력에 의해 발생한다. 고액 연봉과 연구 자율성을 앞세운 스카우트 제안에 핵심 연구원과 임원들이 이동하며, 설계도와 공정 조건, 실험 데이터까지 함께 넘어간다. 지난 7년간 산업기술 유출로 인한 피해 추정액이 30조 원을 넘는다는 분석은, 기술 유출이 국가 경제와 산업 기반을 잠식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중국은 미·중 전략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기술 패권을 국가 생존 전략으로 설정했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재 유인과 기술 탈취는 개별 기업의 일탈을 넘어 국가 차원의 장기 전략이다. 종이·화약·나침반·인쇄술로 기술 문명을 선도했던 나라가 오늘날에는 서방의 첨단기술을 입수하는 데 가장 적극적인 국가로 지목되는 현실은 아이러니하다.

기술을 장악한 쪽이 전장을 지배한다는 원리는 과거에도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13세기 몽골 제국은 중국의 공성 무기와 기술자를 유입하며 유라시아를 제패했다. 무기를 끌고 갈 수 없자 기술과 사람을 데려갔다. 오늘날 중국이 공장을 옮기지 못하면 인재와 설계도, 공정을 옮기는 방식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는 모습은 이 역사와 겹쳐 보인다. 전장은 산업과 기술로 바뀌었지만, 패권의 논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 수준은 여전히 미흡하다. 기술 유출을 개별 기업의 보안 실패나 사후 처벌의 문제로만 접근해 온 탓에, 연구 인력 이동과 퇴직자 관리, 산업 현장 보안, 해외 합작 과정에서의 기술 이전 통제는 서로 단절된 채 운영돼 왔다. 국가 차원의 통합 컨트롤타워와 장기 전략이 부재한 상황에선 조직적 기술 탈취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제도적 한계 역시 분명하다. 현행 산업기술 보호 체계는 처벌 수위와 수사 역량, 예방적 관리 측면 모두에서 충분한 억제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기술 등급 분류와 관리 기준은 급속한 기술 융합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연구 현장에 대한 점검과 지원도 형식에 머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기술 유출을 개별 사건으로 처리하는 사법 중심 접근에서 벗어나 예방과 보호를 중시하는 정책 전환이 요구된다.

중요한 건 종합적 대응 전략이다. 핵심 기술 인력에 대한 처우 개선과 장기근속 유인, 퇴직 이후까지 이어지는 보안 관리, 해외 협력 과정에서 적용되는 기술 보호 기준을 보다 정교화해야 한다. 아울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한 간첩죄 적용 범위를 ‘적국’에서 ‘외국’으로 확대하는 형법 개정안을 조속히 마무리해, 첨단기술 유출을 국가 안보 차원에서 다룰 법적 기반을 갖출 필요가 있다. 산업 안보 전담 체계를 강화해 정보·분석·수사·기업 지원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일도 병행돼야 한다. 총성 없는 전쟁에서 기술은 최후의 전선이다.

<원문출처>

경상매일신문 https://www.ksmnews.co.kr/news/view.php?idx=584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