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성준 서경대 군사학과 교수 칼럼: 북·미 정상회담은 상징일 뿐, 모든 건 한국의 선택에 달려 있다
채성준 서경대학교 군사학과장, 안보전략연구소장

경주 APEC을 계기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북·미 정상회담이 무산된 지금,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공개 제안을 묵살했는지, 그리고 그 침묵 뒤에 숨겨진 복선은 무엇인지를 냉철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북한의 태도는 우발적 선택이 아니라, 재편된 전략적 프레임 속에서 철저하게 계산된 판단이다.
국정원이 10월 말 국회 정보위원회 비공개 보고에서 밝힌 평가가 이를 뒷받침한다. “북한은 러시아와의 밀착과 북·중 관계 회복을 통해 외교적 공간을 확대하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북·미 대화 재개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으며, 특히 내년 3월 예정된 한·미 연합훈련 이후 정상회담을 재추진할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분석은 북한의 행보가 단순한 일회성 외교 모험이 아니라, 외교·안보 환경 자체를 구조적으로 재설계하는 큰 흐름 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북한 전략의 핵심에는 ‘적대적 두 국가론’이 자리 잡고 있다. 과거 단일 적대국으로 미국만을 설정했던 북한은, 최근 남한을 별도의 적대국으로 규정하며 미국과 남한을 동시에 상대하는 외교·군사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단순히 협상력을 높이려는 목적을 넘어, 대미·대남 정책 전반에서 압박 수단을 극대화하고 체제 안전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국제 언론의 분석도 이를 확인시킨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최근 “미국의 비핵화 요구는 시대착오적이며, 우리의 핵 보유는 영구적”이라고 선언했다고 보도했다. 가디언(The Guardian)은 김정은이 과거 트럼프와의 회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완전한 비핵화 요구는 “체제의 본질을 위협하는 것”이라며 협상 문턱을 높였다고 분석했다. 이는 북한이 핵을 협상 카드가 아닌, 체제 정체성의 핵심으로 고착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군사·기술 협력에서도 북한은 새로운 축을 형성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미국 정보당국의 분석을 인용해 러시아가 북한의 핵탄두 소형화, 극초음속 무기 개발, 다탄두 재진입체(MIRV) 기술 등을 지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단순 기술 이전을 넘어 전략적 동맹의 출현을 의미하며, 북한이 북·중·러 삼각 구도를 활용해 대미·대남 협상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모든 흐름은 북한의 전략적 자율성이 과거보다 훨씬 강화되었음을 말해준다. 핵을 외교적 지렛대로 삼고, 미국과 한국을 동시에 상대하는 구조 속에서 협상 전략을 설계하는 북한의 모습은 매우 계산적이다. 따라서 설령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이 성사된다 해도, 그것이 곧바로 비핵화로 연결될 것이라 기대하기 어렵다. 핵 동결이나 부분적 감축 수준의 제한적 조치를 협상 카드로 활용하며, 체제 보장과 제재 완화를 동시에 얻어내려 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외교·안보의 중대한 시험대 위에 놓인다. 북·미 간 대화가 재개되면 한국이 주변부로 밀려나는 ‘코리아 패싱’ 가능성이 과거보다 훨씬 현실화된다. 핵 보유를 전제로 한 제한적 협상이 지속될수록, 한국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완전 비핵화 목표는 점차 힘을 잃게 된다. 지금의 정세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현실이며, 전략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이 이를 돌파하려면 대전환적 대응이 필요하다. 첫째, 북·중·러의 새로운 연대 구조 속에서 한국 중심의 외교적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둘째, 한·미 연합 억지력과 미사일 방어·경보 체계를 실질적으로 강화해 북한의 핵 사용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봉쇄해야 한다. 셋째, 대북 인센티브는 반드시 조건부로 설계하고, 제재 완화는 핵·미사일 활동의 실질적 억제와 연동되어야 한다.
북·미 정상회담의 문은 다시 열릴 수 있지만, 곧바로 한반도 평화로 이어진다고 기대할 수 없다. 북한은 핵을 외교 자산으로 삼아 미국과 한국을 동시에 적대국으로 규정하며 새로운 전략 질서를 구축하고 있다. 급변하는 동북아 안보 지형 속에서 한국이 취할 길은 냉철한 분석과 능동적 전략뿐이다. 한반도 정세는 변곡점에 서 있으며, 한국은 이를 주도할 마지막 기회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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