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성준 서경대 군사학과 교수 칼럼:[채성준 칼럼] 보수의 위기, 그리고 다시 시작할 기회

지방선거가 끝났다. 결과는 냉정했다. 정치권 내에서는 보수가 과연 재기할 수 있을지를 두고 설왕설래가 많다. 전체 선거 결과만 놓고 보면 보수가 깊은 위기에 빠진 건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민주주의 정치의 역사는 승리와 패배가 반복되는 과정이었다. 오늘의 패배가 곧 몰락을 의미하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선거 결과 자체보다 그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다.
우리 현대사에서 보수는 결코 가벼운 존재가 아니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고 시장경제를 정착시키는 한편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냉전과 안보 위기 속에서는 국가의 생존 기반을 다졌다. 물론 그 과정에서 과오와 한계 또한 존재했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자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보수의 역할이 분명히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유권자는 역사적 공로보다 현재의 삶과 미래의 희망을 기준으로 선택한다. 아무리 훌륭한 전통과 가치도 국민이 체감하는 문제에 답하지 못하면 정치적 설득력을 잃게 마련이다. 이번 지방선거는 바로 그 냉엄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결국 정치세력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패배의 크기가 아니라 혁신의 깊이다. 많은 국민은 이념 논쟁보다 경제 회복과 민생 안정, 양질의 일자리, 주거 문제, 저출산과 고령화, 지방소멸과 같은 현실적 과제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 특히 청년 세대는 과거의 정치적 기억보다 미래의 기회와 공정성, 그리고 성장 가능성을 기준으로 정당을 평가한다.
돌이켜보면 한국 보수는 위기 때마다 두 갈래 길 앞에 서 있었다. 하나는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시대 변화에 맞춰 스스로를 혁신하는 길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에도 그랬고, 2016년 탄핵 정국 이후 깊은 침체를 겪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보수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건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 변화하려는 노력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반대로 국민의 목소리보다 진영 논리에 갇혀 있을 때는 어김없이 심판을 받았다.
해외 사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의 영국 보수당은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5년 총선에서 패배했다. 일본 자민당 역시 1993년 창당 이후 처음으로 정권을 잃으며 ‘55년 체제의 종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 공화당 또한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과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이들 모두 시대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탓에 큰 위기를 겪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다시 경쟁력을 회복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선거 결과를 보수의 몰락으로 단정하는 건 성급하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경쟁과 균형의 체제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책임 있는 진보와 건전한 보수가 함께 존재할 때 비로소 제대로 작동한다. 어느 한 정치세력의 장기 독주가 반드시 국가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견제와 균형이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이며, 그런 의미에서 보수의 위기는 특정 정당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정치 전체의 건강성과도 연결된 문제다.
보수의 재건은 단순히 선거에서 다시 승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의제에 답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게 핵심이다. 산업화와 안보라는 역사적 자산은 소중하지만 그것만으로 미래를 설계할 순 없다. 민생 안정과 국가 경쟁력 강화는 물론 인공지능과 첨단기술, 경제안보, 공급망 재편 등 새롭게 부상하는 국가적 과제에 대한 실질적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또한 특정 인물이나 계파 중심의 정치에서 벗어나 실력과 도덕성, 미래 비전을 갖춘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
정치에서 진정한 패배는 선거에서 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왜 등을 돌렸는지 끝내 깨닫지 못하는 데 있다. 반대로 진정한 혁신은 과거의 영광에 머무는 게 아니라 변화한 시대와 국민의 기대에 응답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번 지방선거는 보수에게 뼈아픈 경고장이지만 동시에 쇄신과 재도약의 기회이기도 하다. 오늘의 패배를 성찰의 자산으로 바꿀 수 있다면, 이번 선거는 보수의 몰락이 아니라 새로운 도약의 분기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원문출처>
경상매일신문: https://www.ksmnews.co.kr/news/view.php?idx=607962(새 창 열림)